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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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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우스 2세는 317년에 태어나 361년에 사망한 로마 황제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이자, 337년 아버지의 사망 후 제국을 3분할하여 통치했다. 동로마 제국을 다스리며, 사산 제국과의 전쟁, 내전 등을 겪었다. 종교적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며 이교도 박해를 주도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발전을 장려했다. 361년,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서쪽으로 향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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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콘스탄티우스 2세의 흉상
현대 알-바브, 시리아에서 발견된 콘스탄티우스 2세의 두상 초상화 (펜 박물관)
황제아우구스투스
출생일317년 8월 7일
출생지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시르미움
사망일361년 11월 3일 (44세)
사망지킬리키아 몹수에스티아
매장지신성 사도 교회
배우자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자녀콘스탄티아
전체 이름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왕조콘스탄티누스 가문
아버지콘스탄티누스 1세
어머니파우스타
종교세미-아리우스주의
통치
즉위337년 9월 9일
퇴위361년 11월 3일
선임자콘스탄티누스 1세
후임자율리아누스
공동 통치자




카이사르 통치324년 11월 8일 – 337년 9월 9일
이름
라틴어Flavius Julius Constantius
그리스어Κωνστάντιος (Kōnstántios)

2. 생애

판노니아의 카르눈툼에 있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1세와 황후 파우스타 사이의 둘째 아들로, 317년 일리리쿰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4] 324년 아버지에 의해 부제(Caesar)로 임명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337년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대규모 왕족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의 후손 대부분이 제거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 학살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의심했다.[74][11] 이 숙청에서 살아남은 것은 어린 사촌 갈루스율리아누스뿐이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형 콘스탄티누스 2세, 동생 콘스탄스와 함께 제국을 3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었고, 그는 제국 동방 지역(트라키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맡아 안티오크를 거점으로 삼았다.

동방을 통치하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여러 차례 국경 분쟁과 요새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패 없이 전쟁은 지속되었다. 한편 서방에서는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져, 340년 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동생 콘스탄스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후 350년에는 콘스탄스마저 게르만족 출신 장군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의 찬탈에 맞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라니오 등 다른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351년 무르사 전투에서 마그넨티우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마그넨티우스는 353년 자결하였고,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79]

단독 황제가 된 후, 그는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을 제국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 유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의심 많은 모습을 보였으며, 354년에는 동방 통치를 맡겼던 사촌이자 부제였던 갈루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80] 355년에는 갈루스의 이복동생 율리아누스를 새로운 부제로 임명하고 갈리아로 보냈다.

말년에는 다시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 문제와 도나우강 유역의 이민족 침입에 대처해야 했다. 그러던 중 360년, 갈리아의 군단이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던 중, 361년 킬리키아타르수스 근교에서 병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

밀리아렌세 은화에 새겨진 카이사르 시절 콘스탄티우스 2세의 옆모습
밀리아렌세에 새겨진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 2세, 서기 327년


푸른 유리로 만들어진 왕자 시절 콘스탄티우스 2세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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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vius Julius Constantius|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la는 317년 일리리쿰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 판노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4]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파우스타(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사이의 아들로, 이복 형 크리스푸스를 포함하면 셋째 아들이자 파우스타 소생으로는 둘째 아들이었다. 이름에 포함된 "율리우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콘스탄티우스 1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율리아 콘스탄티아를 기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5][6]

326년, 콘스탄티우스의 이복 형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고발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 이 고발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파우스타 역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환관들이 관리하는 궁정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324년 11월 8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부제(Caesar)로 임명되었다.

336년,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문제와 콘스탄티누스 1세사산 제국샤푸르 2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로마와 사산 제국 간의 전쟁이 임박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전쟁 준비 중 병이 들자, 콘스탄티우스를 동쪽으로 보내 동부 국경의 지휘를 맡겼다.[7] 콘스탄티우스가 도착하기 전, 페르시아 장군 나르세스(Narses)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아미다를 점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즉시 나르세스를 공격하여 나라사라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살해했다.[8] 이후 그는 아미다를 탈환하고 도시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으며, 인근에 안티노폴리스(Antinopolis)라는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9]

337년 5월 22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아버지의 장례식에 유일하게 참석한 아들이었다. 장례식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대규모 왕족 학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콘스탄티우스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 특히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부제 칭호를 받았던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를 포함한 수많은 왕족들이 살해당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 학살의 배후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지목했다.[74]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당시 12살이었던 갈루스와 6살이었던 율리아누스뿐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살아남은 세 아들, 즉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는 모두 황제(Augustus)의 지위에 올라 제국을 3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삼아 제국의 동방 속주(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지방, 그리스, 아시아, 이집트)를 다스리며 사산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게 되었다. 한편, 형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동생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2. 2. 삼두정치와 내전



337년 초,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급히 향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7년 5월 22일 사망하자, 콘스탄티우스는 성 사도 교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며 아버지를 매장했다.[11] 아버지의 죽음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군대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는데, 이는 콘스탄티우스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친척들을 대상으로 했다. 자세한 경위는 불분명하지만,[11] 이 사건으로 콘스탄티우스의 두 삼촌(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과 일곱 명의 사촌(폰토스 교구의 통치자였던 한니발리아누스와 모에시아 교구의 통치자였던 달마티우스 포함)이 목숨을 잃었다.[11]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남성 혈족은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두 형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그리고 세 명의 어린 사촌 갈루스, 율리아누스, 네포티아누스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 학살이 군대의 자발적인 반란의 결과라고 발표되었지만,[12][13] 당시의 역사가들(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조시무스, 리바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과 율리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우스가 이 사건을 사주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기록했다.[11][74] 학살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후 명예 훼손이 이루어졌고,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가 사실상 추방된 점 등은 이것이 계획된 숙청이었음을 시사한다.[11]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임명한 카이사르들에게 로마 제국이 분할된 모습. 달마티우스가 죽기 전.


학살 직후인 337년 9월, 콘스탄티우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형제들을 만나 제국을 3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뜻에 따른 이 분할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트라키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키레나이카 등 제국 동방의 속주들을 차지하고 안티오크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형 콘스탄티누스 2세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모리타니아 팅기타나 등 서방 속주를, 동생 콘스탄스이탈리아, 아프리카 속주, 일리리쿰, 판노니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등 중앙 지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콘스탄스가 형 콘스탄티누스 2세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 동부를 맡은 콘스탄티우스는 곧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의 침략에 맞서 337–361년 페르시아-로마 전쟁을 재개했다.[14] 337년, 샤푸르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니시비스를 포위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14] 이후에도 콘스탄티우스는 니시비스, 싱가라, 아미다(현재의 디야르바키르) 등 주요 요새를 중심으로 샤푸르 2세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했다. 비록 개별 전투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우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영토 획득에는 이르지 못했다.[15] 로마군은 나라사 전투에서 샤푸르의 동생 나르세스를 죽이는 등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마그넨티우스의 청동화


한편, 제국 서방에서는 형제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340년,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동생 콘스탄스의 영토인 이탈리아를 침공했다가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75] 이로 인해 콘스탄스는 형의 영토까지 차지하며 제국 서부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고, 제국은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그러나 이 구도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350년 1월, 콘스탄스가 게르만족 출신 장군 마그넨티우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암살당했고, 마그넨티우스는 스스로 로마 황제를 칭하며 서방을 장악했다.

마그넨티우스의 찬탈 이후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350년 3월, 일리리쿰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노장 베트라니오가 마그넨티우스에 대항하여 황제를 자칭했고,[76] 6월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네포티아누스가 로마에서 황제를 선언했다.[76] 네포티아누스의 반란은 곧 마그넨티우스에게 진압되었지만, 베트라니오는 그해 12월까지 세력을 유지하다가 나이수스(현재의 세르비아 니시)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를 만나 설득 끝에 제위를 포기하고 항복했다.[76][77] 콘스탄티우스는 베트라니오의 군대를 흡수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일각에서는 베트라니오와 네포티아누스의 반란이 콘스탄티우스가 마그넨티우스를 견제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배후에서 조종한 결과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77]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금화. 콘스탄티우스의 사촌으로, 350년에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으며, 황제의 여동생인 콘스탄티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동부 속주를 잘못 관리하여 354년에 죽었다.


마그넨티우스와의 결전을 준비하면서 콘스탄티우스는 제국 동방의 안정을 위해 351년 3월, 연금 상태에 있던 사촌 갈루스부제로 임명했다. 그는 갈루스를 여동생 콘스탄티나와 결혼시키고 안티오크를 중심으로 동방 속주의 통치를 맡겼다.[77] 이후 콘스탄티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마그넨티우스 토벌에 나섰다. 351년 9월 28일, 도나우강 유역의 무르사(현재의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에서 벌어진 무르사 전투에서 콘스탄티우스는 치열한 전투 끝에 마그넨티우스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78] 이 전투는 로마 내전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패배한 마그넨티우스는 이탈리아를 거쳐 갈리아로 도주했으나, 콘스탄티우스 군대의 추격을 받자 353년 8월 결국 자결했다.[79]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는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정제(Augustus)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을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동방을 맡겼던 부제 갈루스의 통치가 포악하고 무능하다는 보고가 잇따르자,[80] 콘스탄티우스는 그의 권력 남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354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를 메디올라눔으로 소환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갈루스는 이동 도중 부제 지위를 박탈당하고 크로아티아폴라 근처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80] 이는 콘스탄티우스가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2. 3. 단독 황제

350년, 콘스탄스 1세가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하고 마그넨티우스가 서방 황제를 자칭하자, 동방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와 맞서기로 결정했다.[77] 이 시기 일리리쿰의 장군 베트라니오 역시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76], 콘스탄티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이를 수락하고 베트라니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인정하며 회유했다.[76] 이후 콘스탄티우스가 도착하자 베트라니오는 자발적으로 지위를 양보하고 비티니아에서 은퇴했다. 한편, 콘스탄티우스는 동방 통치를 위해 사촌 갈루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고 자신의 누이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켰다.[77]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판노니아의 무르사 마요르 전투에서 마그넨티우스 군대와 격돌했다. 이 전투는 로마 군대 간의 전투 중 가장 격렬하고 사상자가 많았던 전투 중 하나였으며[78], 콘스탄티우스는 막대한 희생 끝에 승리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북부 이탈리아로 후퇴했으나, 콘스탄티우스는 즉시 추격하지 않고 도나우강 국경 방어에 집중하며 352년 초까지 사르마티아인과 싸웠다. 이후 콘스탄티우스는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여러 도시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마그넨티우스를 압박했다. 마그넨티우스는 남부 갈리아로 다시 후퇴했다. 353년,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자[79], 마그넨티우스는 같은 해 8월 10일에 자살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79]

솔리두스(''Solidus'') 354~357년 메디올라눔에서 주조됨. 뒷면에는 ''gloria rei publicae''(공화국의 영광)라고 새겨져 있다.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메디올라눔(밀라노)을 거점으로 삼았다. 353년 말과 354년 초에는 도나우강 국경에서 알레만니족과의 전투에 집중하여 일시적으로 그들의 침입을 막았다.[16] 그러나 동방을 맡긴 부제 갈루스의 통치에 대한 불안한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80][16] 이 때문에 콘스탄티우스는 알레만니족과 평화 조약을 맺고 메디올라눔으로 돌아왔다.[17]

354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와 그의 아내 콘스탄티나를 메디올라눔으로 소환했다.[19] 콘스탄티나가 도중에 비티니아에서 사망하자[19] 갈루스는 소환에 응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결국 서쪽으로 이동하여 판노니아의 포에토비오(프투이)에 도착했다.[21][22] 그곳에서 갈루스는 바르바티오가 지휘하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23] 폴라로 이송된 후 심문을 받았다. 갈루스는 동방 문제의 책임을 죽은 콘스탄티나에게 돌렸고[24], 이에 격분한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의 처형을 명령했다.[25] 잠시 후 마음을 바꿔 처형 중지 명령을 내렸으나[26][27][28], 환관 에우세비우스의 방해로 두 번째 명령이 전달되지 못했고 결국 갈루스는 처형되었다.[80][22]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의심 많은 성격은 355년 클라우디우스 실바누스의 반란을 유발하기도 했다.[81] 유능한 프랑크족 장군이었던 실바누스는 무고한 모함을 받자, 콘스탄티우스의 성격을 고려할 때 반란 외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81] 곧 무고함이 밝혀졌지만 이미 실바누스는 지지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상태였고, 결국 황제를 자칭한 지 28일 만에 암살되었다.

갈루스 처형 후, 콘스탄티우스는 355년 11월, 갈루스의 이복동생이자 살아남은 마지막 사촌인 율리아누스를 새로운 부제로 임명하고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시켜 갈리아로 보냈다.

357년부터 콘스탄티우스는 다시 동방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도나우강 유역에서 사르마티아인, 수에비족, 콰디족과 전투를 벌인(357-358년) 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다시 국경을 침공하자 동방으로 돌아가 페르시아와 싸웠다. 그러나 360년, 갈리아에 있던 부제 율리아누스가 군단에 의해 황제(''Augustus'')로 추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82] 콘스탄티우스는 처음에는 율리아누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페르시아와 급히 강화를 맺고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361년, 소아시아의 타르수스 근처에서 병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시에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2. 4. 죽음

율리아누스갈리아에서 복무하던 중, 360년 초 알레만니족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동방 원정을 위해 율리아누스 군대의 증원을 요청하자, 갈리아 군단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율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60] 당시 사산 제국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즉시 사촌의 찬탈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는 율리아누스에게 서신을 보내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포기하고 ''카이사르'' 칭호에 만족하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361년에 이르러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사산 제국과의 전선은 소강 상태였다. 그는 361년 초 아드 티그리스 요새 탈환에 실패한 후[61] 안티오크로 물러나 샤푸르 2세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재정비하고 있었는데,[62] 전년도 원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사산 왕조가 그해에는 새로운 원정을 시도하지 않아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와의 대결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즉시 군대를 모아 서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킬리키아의 몹수에스티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심각한 열병에 걸려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세미 아리우스파의 안티오크 주교인 유조이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한 임종 직전 율리아누스를 자신의 정당한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소문으로 기록하는 등[60] 논란이 있으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내전 방지나 왕조 안정을 위한 실용적 조치로 보기도 한다.[63][18]

콘스탄티우스 2세는 361년 11월 3일, 타르수스 근교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64]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성 사도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10세기 콘스탄티누스 7세의 저서 ''의전에 관하여''에 묘사된 반암 석관에 매장되었다.[65]

케르치 미소리움에 묘사된 콘스탄티우스 2세. 창을 들고 말을 탄 채 경호원과 함께 행진하는 모습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3. 종교 정책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하고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그리스-로마 신전의 파괴를 부추겼다. 또한 동시에 수많은 아리우스 반대파 주교들을 추방하고 박해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영향력 있는 반(反)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처리 문제를 놓고 형제인 콘스탄스와 대립했고 나중에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4년의 연대기에 묘사된 모습 (르네상스 시대의 카롤링거 복사본 복사본) 대중에게 보상금을 나누어 주는 모습


금메달 2개가 포함된 벨트의 일부로, 더 큰 동전에는 전차를 탄 개선하는 황제가 묘사되어 있다; The Walters Art Museum


350년대의 법률은 이교도의 제사를 집행하거나 참석한 자,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30][31][32] 이교 사원은 폐쇄되었고,[33][39] 승리의 제단은 원로원 회의장에서 철거되었다.[34] 또한, 일반 기독교인들이 고대 이교 사원, 묘지, 기념물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훼손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35][36][37][38]

이교는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황제의 정책은 많은 총독과 치안 판사에 의해 소극적으로 저항받았다.[39][40][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우스는 다양한 로마 사제 단체나 베스타 여신관을 해산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이교 학교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때로는 실제로 이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아프리카를 위한 사제 선출을 명령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를 유지했으며, 사후 로마 원로원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교에 대한 그의 상대적인 온건함은 그의 사후 20년이 넘어서 그라티아누스 치세 동안, 어떤 이교도 원로가 그들의 종교에 대한 그의 처사에 항의했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흔히 아리우스주의 신봉자로 여겨지지만 결국에는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신조 사이의 절충적인 제3의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후에 반 아리우스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4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이 절충적인 입장을 따르도록 기독교 교회를 개조하려 했으며, 여러 기독교 공의회를 소집했다. 역사가 A. H. M. Jones는 "불행히도 그의 기억을 위해, 그가 조언을 구했던 신학자들은 결국 신뢰를 잃었고 그가 복종을 강요했던 불만 세력들이 승리했다"라고 썼다. "따라서 359–60년의 대공의회는 교회의 전통에서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여겨지지 않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는 통일의 복원자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교회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이단자로 기억된다."

그리스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우스 (439년 사망)의 《교회사》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테오필로스 인도인(또는 "예멘의 테오필로스")으로 알려진 아리우스주의 주교를 당시 남아라비아의 힘야르 왕국 왕이었던 타란 유하님에게 보내 백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도록 했다. 보고에 따르면 테오필로스는 세 개의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했으며, 그 중 하나는 수도 자파르에 있었다.[43]

유대교는 콘스탄티우스 2세 치하에서 몇 가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노예 소유를 제한하는 칙령[44]과 유대인과 기독교 여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령이 포함되었다.[44] 이후 칙령은 배교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기독교에서 유대교로의 개종을 막으려 했다.[45] 그러나 콘스탄티우스의 이러한 조치는 유대교 종교 자체보다는 유대인 사업과 더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사적으로 소유한 유대인 사업체들이 종종 국영 사업체와 경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콘스탄티우스는 유대인 사업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숙련된 노동자와 노예를 제한함으로써 국영 사업체에 유리한 입지를 제공하려 했을 수 있다.

4.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관계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87][83]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방의 정제로 있을 때는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지냈고, 단독 황제가 된 후에는 이탈리아의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성 소피아 대성당과 성 사도 교회 건설과 같은 중요한 사업들을 진행했다.[83] 359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속주 도시에서 지방 자치 도시로 승격시켰다.[84]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원로원을 설치한 인물도 콘스탄티우스 2세로 여겨진다.[85] (다만,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원로원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86])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을 시작한 324년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부제로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87] 즉,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설되던 시기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부제로 활동하던 기간과 일치한다.[87] 역사학자 나구모 타이수케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87]

5. 평가



디마이오와 프레이크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행동과 통치에 대한 1차 자료 저자들의 상반된 관심 때문에 현대 역사가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70] A. H. M. 존스는 암미아누스의 기록을 인용하며 그를 "양심적인 황제이지만, 허영심이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며, 아첨꾼에게 쉽게 먹잇감이 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또한 "소심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이해 관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의 두려움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70]

그러나 켄트와 히르머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비우호적인 저자들, 교회와 민간 모두에게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정통 교회 신자들에게 그는 아리우스파 이단의 편협한 지지자였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살인자, 폭군, 무능한 통치자로 비춰졌다. 반면,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은 사실 그를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확실히 그의 형제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덧붙였다.[71]

에우트로피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72]

그는 매우 평온한 성격의 사람이었고, 좋은 품성을 지녔으며, 친구와 궁정 신하를 너무 많이 믿었고, 마침내 그의 아내들의 권력에 너무 많이 의존했다. 그는 그의 통치 초기에 매우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의 친구들을 부유하게 했고, 그의 활동적인 봉사를 경험한 사람을 아무도 보상 없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부에 대한 시도가 그에게 의심될 때마다 다소 엄격한 경향을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온화했다. 그의 운세는 외국 전쟁보다 시민 전쟁에서 더 칭찬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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